‘다름’을 이해하고, ‘차이’를 극복하다.
2021. 04. 20. 장애인의 날 ‘다름’을 이해하고, ‘차이’를 극복하다. April 20 mark Disabled Day
1981년 UN에서 ‘세계 장애인의 해’를 선언하고 세계 모든 국가에 관련 사업을 추진하도록 권장합니다. 한국은 만물이 소생하는 매년 봄인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제정합니다. 이날은 단순 장애인을 위한 날이 아니라 장애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돕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을 이해하기 위해 제정된 ‘법정’ 기념일입니다.
등록 장애인 수 및 장애인구 - 연도별
국내 2019년 등록된 장애인 현황에 따르면 총 2백61만 8천 명으로 2012년부터 감소 추세였으나 2016부터 증가 추세로 보입니다. 장애는 주로 후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고령화를 포함하여 질병, 질환으로 인한 장애가 56.1%, 사고가 32.1%로 전체 후천적 원인이 88.1%나 되었습니다. 선천적 원인은 5.1% 정도를 기록합니다.
- 출처 2019 장애통계 연보 (한국장애인개발원) -
전체 인구/장애 인구 고령화 수준 - 연도별
2018년 말 기준으로 전체 등록 장애인 대비 65세 이상 장애인 수는 1,206,482(46.7%)으로 고령화수준은 2013년 40%대를 돌파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령화 수준은 2000년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였고, 현재 고령화 수준 측면만 고려할 때 이미 심각한 고령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출처 2019 장애통계 연보 (한국장애인개발원) -
후천적 장애도 겪을 수 있습니다.
등록된 장애인 통계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는 신체적 제약을 통해 장애인/비장애인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한해 한해 성실하게 나이는 들어갑니다. 국민 4명 중 1명이 노인인 시대가 왔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 우울증, 공황 장애, 수면 장애 등 신체적, 정신적 장애 상황에 처하기도 하죠. 학폭, 질병, 가난, 이혼 등 여러 환경적, 정서적 장애와 제약에 놓이기도 합니다.
강영우 지음 <두란노>
강영우(Young Woo Kang)
1944.01.06 ~ 2012.02.2515살, 중학생 시절 축구를 하다가 축구공에 눈이 맞아 각막 박리증으로 실명하였습니다. 연이어 아버지, 어머니, 누나를 잃고 동생들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에서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어려웠던 시기 그는 걸스카우트 회원으로 자원봉사를온 숙명여대생 석은옥님을 만나 결혼을 하죠.
그리고 어렵게 미국 유학을 가서 교육학 박사를 받았습니다. 강영우 님은 한국 최초의 장애인 정규 유학생이며, 이를 계기로 한국 내 장애를 유학 결격사유로 규정한 조항이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박사 학위 이후, 한국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없어 미국에서 교수, 일리노이 주 특수교육국장, 부시 행정부 장애인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역임하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을 그 시대적 상황과 장애를 훌륭하게 극복한 이 부부는 출세지향적이 아닌 성취 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장애를 통해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과 보람을 느꼈다고 소회하고 있습니다.
강영욱 저서 : ‘내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석은옥 저서 : ‘해피 라이프’
MBC 드라마 ‘눈먼 새의 노래’ 의 실제 주인공
‘Let’s me win. But if I cannot win. Let me brace in the attempt.’
1st Viscount Nelson.
Lemuel Francis Abbott -
National Maritime Museum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st Viscount Nelson)
1759.09.29 ~ 1805.10.21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유럽을 장악해 갈 때,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승리한 영국 해군의 명장입니다.
전쟁에서 오른쪽 눈과 오른팔을 잃고, 절망하여 ‘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적은 적도 있지만, 그는 미국 독립 전쟁, 세인트빈센트 해전, 나일강 전투, 코펜하겐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 등에 참전하고, 여러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멀미도 심한 체질과 남은 왼쪽 시력도 점점 잃어가는 와중에서 바다에서의 거의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넬슨 제독은 종종 한국의 이순신 장군과 비견되기도 합니다.
이런 승리의 배경에는 ‘넬슨 터치’로 불리는 전술이 있었습니다. 부하 직원들을 신뢰하고 부대원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낸 넬슨의 전략과 그의 함대는 지역적, 환경적, 신체적 제약을 넘어 승리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his classic poses at the piano.
William Morris Agency
(management) / Photo by
Maurice Seymour, New York.
레이 찰스(Raymond Charles Robinson)
1930.09.23 ~ 2004.06.10대공황 시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기,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R&B의 대부, 20세기 소울 음악을 대표하는 위대한 아티스트입니다.
어릴 때, 한 살 어린 동생을 잃고, 7살에 녹내장으로 완전히 시력도 잃었습니다. 아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어머니마저 15살에 사고로 잃어 고아로 흑인 빈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행히도 어린 시절, 이웃 카페 주인 덕에 쳐본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해 어거스트 장애아 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하였습니다. 레이는 가족을 모두 잃은 후, 블루스 밴드를 따라 미국 전역을 방랑하며 다양한 악기를 다루고, 음악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R&B 의 대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7번의 그래미 수상,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정 가수, 여러 대학, 미국 프랑스 정부의 학위와 명예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영화 : Ray / 자서전 : Brother Ray : Ray Charles’ Own Story(1978)
Georgia on my mind, Hit the road jack, What’s I Say, Let's Go Get Stoned
Unchain My heart, I can't stop loving you
der Partitur zur Missa Solemnis
aus dem Jahr 1820 von
Joseph Karl Stieler.
1820년 조셉 칼 슈틸러의
베토벤 초상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 ~ 1827.03.26‘한때 내가 가장 완벽하다고 인정받았던 청각이, 이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말았어’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보내는 유서에서 -
바흐, 모차르트와 함께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독일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간 연주자입니다. 절대음감으로 당대 인정받던 작곡가는 20대 중후반에 찾아온 이명과 질병으로 청력을 잃고 위와 같은 유서를 쓰기도 하죠.
하지만, 그 이후 베토벤은 자신의 곡'운명'처럼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합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악필이지만 식탁보, 벽지 등 어디든지 메모하는 메모광으로 떠오르는 악상과 생각을 정리합니다.
오페라에서 가곡, 오라토리오, 미사와 같은 장르를 넓히면서, 당시 흔하지 않던 저작권을 고려하기도 합니다.
그는 독보적인 음악 재능 뿐만이 아니라, 지독한 노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명민한 통찰력 또한 가지고 있던 천재였습니다. 아직도 그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연구하고, 그에 대한 모든 것들을 수집하면서 발자취를 따르고 있습니다.
'절망하여 죽으려 했으나, 예술이 나를 붙잡는다.'
9개의 교향곡, 32곡의 피아노 소나타, 5곡의 피아노 협주곡, 21개의 피아노 변주곡, 11곡의 피아노 3중주,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Cervantes Saavedra
commonly said to be that
which, according to the
prologue to Cervantes'
"Exemplary Novels",
was painted by Juan de
Jauregui.
세르반테스의 초상화 /
후안 드 자우레기 그린것으로
알려짐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09.29 ~ 1616.04.22돈키호테를 쓴 스페인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군인, 시인, 극작가, 세금 징수원입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빚 때문에 가족들은 스페인 전역을 떠돌며 살았고, 정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있는 활자로 된 종이들을 주워서라도 읽는 다독광 이었습니다.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왼쪽 팔을 잃고 포로가 되기도 합니다. 없는 살림에 가족들이 몸값을 치르고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중, 해적들에게 다시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빚 때문에 감금되기도 합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을 때, 돈키호테를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역작 ‘돈키호테’를 통해 세대를 초월한 문학으로 틀에 박힌 생각과 고정관념들을 과감하게 타파하고, 망설이지 말고 무엇이든 도전해보라는 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메시지들을 후대에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Dream the impossible, Do the impossible love, Fight with unwinnable enemy.
Resist the irresistible pain, Catch the uncatchable star in the sky.’
‘Cuando una puerta se cierra, otra se abre.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립니다.)’
/ Photo Image by NULI
세종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1937.05.15 ~ 1418.09.09조선의 4대 국왕으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가장 존경받는 왕입니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즐기고,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으나, 편식이 심하고 운동 부족과 과로로 성인병과 안과 질환을 앓다가 결국 시력을 잃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을 중요하게 여겼던 세종대왕은 명통시를 설립하고 점복사, 독경사, 악공 등 다양한 일자리를 창출하여 백성들 누구도 소외하지 않고, 고루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주자소를 설치하여 인쇄술을 발달시키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굴하여 측우기, 해 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면서 언어학, 과학 기술, 농업, 교육, 조세, 의술과 음악 등을 고루 발전시킵니다. 방대한 편찬 사업으로 백성이 필요한 정보를 널리 알리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북에는 사군 육진, 남에는 삼포를 두어 국가의 국방력 또한 강화하여 조선의 기틀을 만든 성군입니다.
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는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
'남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위엄과 무력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자는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가꾸지 않은 땅은 자신의 영토가 아니고 보살피지 않은 백성은 자신의 백성이 아니다'
'인재를 얻어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한다'
'그대의 자질은 아름답다. 그런 자질을 가지고 아무것도 않겠다 해도 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대가 만약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 말길.'
Antonio Cruz
/ABr - Agencia Brasil.
스티비 원더(Stevland Hardaway Morris)
1950.05.13 ~1950년대 미시건주, 6주 정도 빨리 태어나면서 안구 뒤쪽 혈관이 폐쇄되어 미숙아 망막증이라는 병으로 인큐베이터에 있다가 실명이 됩니다. 4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디트로이트시로 이사합니다.
부모님의 이혼, 가난, 인종차별 속에서, 시각장애가 있던 스티비의 유년시절은 친구도 별로 없이 외로웠다고 합니다.
이 시기, 학교 생물 시간에 실험하던 쥐가 도망가 모두 찾고 있던 와중에 스티비는 놀라운 청각으로 교실 구석 벽장의 쥐를 찾아냅니다. 이때, 선생님은 스티비에게 이렇게 말하죠.
‘넌 누구도 갖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게 바로 너의 특별한 청력이란다'
이 유년의 기억에 대해 스티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제 인생은 그때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제가 눈이 안 보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슬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제게 청력의 축복이 주어졌다는 것을 선생님으로 인정받는 순간, 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자신을 얻었습니다.
그 뒤, 그는 뛰어난 청력과 음감을 바탕으로 다양한 악기에 집중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합니다. 피아노, 하모니카, 드럼, 기타, 베이스등을 다루고, 작곡, 편곡까지 가능한 실력자로 인정받으면서, 20세기 대중음악계 R&B, 소울, 펑크, 가스펠, 팝, 재즈를 섭력한 살아있는 전설이자 거목이 되죠.
그리고 앞서 설명한 레이 찰스와 만나서 환상적인 콜라보 무대를 연출하기도 합니다.
2021년 2월 오프라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인종차별등의 사회적 문제로 가나로 이주할 계획이 있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어떤 사람은 그 능력을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
Isn't she lovely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1984)
That's What Friends Are For …
Sullivan in 1898.
On the left Helen Keller
and on the right
Anne Sullivan.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06.27 ~ 1968.06.01생후 19개월에 뇌 척수염으로 인해 시각, 청각을 모두 잃고,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 교육을 시작합니다.
그전까지 응석받이인 환경에 있었던 헬렌은 설리번을 통해 손바닥 글씨부터 시작하여 퍼킨스 농아학교, 호렌스 만 농아학교에서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고 느끼게 하는 법으로 말하는 법을 익힙니다.
그 당시 미국은 여성의 교육과 사회활동 또한 쉽지 않았지만, 헬렌은 인문계 학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시청각 장애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프레제트를 포함한 여성 참정권 운동, 반전 운동, 아동 노동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지지하고, 평생을 함께한 앤 설리번과 수십 개국을 방문하면서 강연을 통해 기금을 조성합니다.
1937년 한국 경성과 대구를 방문하여 강연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다시 한번 더 방문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 의복을 한번 입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오늘 아침 어떤 친절한 사람이 한 벌 가져다주어 곧 입어 보았는데, 어찌 잘 되었던지 나는 그 옷을 입고 춤을 추었습니다.’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설리번은 헬렌이 스스로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강연 활동은 헬렌이 자립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바람대로 헬렌은 설리번이 죽고 난 후, 32년을 더 살다가 8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행복이란 생리적 귀와 눈을 가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참으로 듣는 귀 보는 눈을 가짐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
print, 15.2 by 10.8 cm)
by Guillermo Kalho `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멕시코시티의 교외에서 태어난 프리다는 6살에 소아마비로 9달간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사직작가였던 아버지는 어린 프리다에게 철학, 고고학, 음악, 미술, 사진들을 교육합니다. 재활훈련으로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수영, 복싱, 레슬링을 두루 섭렵하며 더할 나위 없이 밝고 똑똑하게 성장합니다.
매우 영리하여 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온갖 사고와 장난의 중심에 있어 퇴학당했을 때는 멕시코 장관에게 직접 항의서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벽화를 그리던 유명해질 화가 디에고와 만나 결혼을 하죠.
그녀의 소아마비는 재활과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되나 싶었는데,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십여조각이 넘게 골절되고, 요추, 골반, 쇄골 등 온 몸의 주요 부위가 골절되어 하반신 마비 장애와 35차례가 넘는 수술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디에고의 끊임없이 복잡한 외도로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하죠.
이러한 뼈가 부서지는 고통과 경험들은 그녀의 초현실주의 화풍에 반영되었습니다. 수많은 자화상과 선명한 색채는 보는 사람들이 고통의 감각을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각적 상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통해 가부장제, 성차별, 낙태, 계급 등 여성을 제한하는 억압과 강요된 사회적 압력과 같은 세태에 반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가 성별을 초월한 하나의 개인이라 생각했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관찰하여 주변의 사물과 연관시킨 자화상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개인의 가치를 이해하고 어떠한 장애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도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화 : 코코
'고통, 기쁨,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 이 과정의 혁명적 투쟁이야말로 지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일생 동안 나는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이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Yo sufri dos accidentes graves en mi vida, uno en el que un autobos me tumbo al suelo.
El otro accidente es Diego;. Diego fue el peor..’
National Archives, The
Hague, Fotocollectie
Algemeen Nederlands
Persbureau (ANEFO),
1945-1989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07.02 ~ 1962.08.09독일계 스위스인으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데미안’, ‘싯다르타’,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하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시인 예술가입니다.
그는 선교사인 아버지 아래서 매우 엄격함과 의무감, 종교적 신념, 학업에 대한 기대와 압박, 장래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 등으로 도망치고 싶은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러한 타인의 기대와 억압 속에서 보낸 경험들로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고, 지독한 우울증과, 언어 장애 등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죠.
어렵게 부모님이 그렇게 바라던 신학교에 진학하지만, 결국 7개월 만에 자퇴합니다. 그리고 칸슈타트 김나지움에 입학하지만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당하고, 시계 공장 견습공을 거처 대학교 근처 서점에서 틈틈이 시를 쓰고 글쓰기를 합니다.
헤세는 평생에 걸쳐 인간의 삶과 내면의 모습을 탐구하고, 스스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정신 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과도 만나 정신 분석학을 탐구하면서, 그 이론에서 영향을 받아 데미안을 집필합니다. 그리고 유리알 유희를 통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아 성찰과 갈등을 이겨낸 내적 성찰 등을 통한 현실과 이상에 대한 사색적인 메시지로 노벨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합니다
그렇게 그는 경계성 인격장애에 가까웠던 스스로의 정신세계 속에서 둘러싸였던 억압과 불안한 세계를 파괴하며,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소설로 솔직하게 풀어내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들을 후대에 전해줍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이야기한 위인들은 사고로, 질병으로, 과로로, 전쟁으로, 그 당시 의학기술이 낙후된 이유로,
억압된 환경으로 인해 다양한 장애를 겪었습니다.
여기에 인종차별, 성차별, 제도적 차별, 가난, 배우자의 외도, 주변인들의 죽음과 같은
온갖 불행의 클리쎄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삶을 시험했습니다.
" 때로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그 시기.
레이 찰스에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했던 옆집 카페 주인처럼,
스티비 원더에게 특별한 청력을 깨우쳐준 선생님처럼,
헤르만 헤세와 정신 분석을 함께해 준 구스타프 융처럼, 현재의 장애 상황에서 주변의 아주 사소한 계기를 통해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움트게 할 수가 있습니다. "
Accessibility
하지만 모두가 필요할 때, 이런 주변의
격려와 기회들이 주어지기란 참 어렵습니다.
지금은 옆집에 피아노 치러 가기는커녕,
누가 옆집에 사는지도 모르는
사회에 살고 있기도 하죠.
그래도 우린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필요한
기회의 정보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보가 누구도
소외하지 않고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접근성(Accessibility)이 지켜져야 합니다.
Useful Content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 학교에서나, 인터넷에서든,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어떤 형태로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못하는지, 어떤 것을 하면
행복해지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흘러가는
정보 한 단락이 작은 계기를 틔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혼자라고 생각하며, 어려운 상황과 장애를 극복하고 있는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필요한 정보를 위해 인터넷 너머 다양한 정보를 만들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보의 접근성을 지키기 위한 사소한 대체 텍스트 한 단락, 저시력 사용자와 어르신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고려된 명도 대비, 손이나 신체가 불편한 사용자를 위한 키보드 접근성이나 초점 이동 등과 같은 배려가 UX 기획안에, UI 디자인에, 마크업과 개발 코드 속에서 이러한 기회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딸의 재활을 위해 다양한 교육을 기획했던 프리다의 아버지처럼, 대체 수단을 사용해서 교육을 시도했던 설리번 선생님처럼, 부대원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낸 넬슨 터치와 같이 우리는 직접 만나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교육과 정보, 격려과 공감, 그리고 대체 수단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메모광이 되면서 잃어버린 청력을 보완한 베토벤처럼, 학교에 가지 못한 대신 엄청난 독서광으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처럼, 전쟁 직후 그 어려운 시기에서도 제도적 차별을 하나씩 철폐해간 강영우 박사님처럼 약한 부분보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잠재력 있는 우리들을 위해, 세종대왕님이 남기신 말씀 한구절을 마지막으로 전합니다.
" 그대의 자질은 아름답다. 그런 자질을 가지고 아무것도 않겠다 해도
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대가 만약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 말길... " - 세종 22년(1440) 7월 21일 -
관련 법령 참고
장애인복지법 제 14조(장애인의 날)
- ①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의욕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하며, 장애인의 날부터 1주간을 장애인 주간으로 한다.
- ②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의 날의 취지에 맞는 행사 등 사업을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