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장애인 배우의 접근성과 가능성

엔비전스 접근성 2025-04-14 14:49:44

안녕하세요. 엔비전스입니다.

그동안 저희는 다양한 아티클을 통해 장애인이 음악을 즐기는 방식,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 등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소개해 왔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에서, "배우"라는 직업을 중심으로 장애인의 연기 활동과 그 접근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우리는 극장과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마주합니다. 그들은 웃고 울며 분노하고, 또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감정을 연기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배우라 부릅니다. 배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그중, 휠체어를 사용하는 배우, 수어로 소통하는 배우, 흰 지팡이를 든 배우가 있으신가요? 그들이 실제로 장애를 가진 배우였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장애인 배우에 대한 논의는 이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단지 '장애인 캐릭터'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실제 장애를 가진 배우가 자신의 모습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

장애인 배우는 사실 배역보다도 무대에 서는 일부터가 어렵습니다. 연기 실력을 갖추는 것 외에도, '무대에 설 자격이 있다'는 것을 먼저 입증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장애로 인한 신체적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무대와 카메라 뒤에 존재하는 시스템,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과 구조적 장벽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도 연기를 할 수 있나? 같은 근본적인 인식 문제가 있습니다. 국내 주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장애인 캐릭터가 등장하더라도 실제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 배우가 해당 역할을 연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이처럼 장애가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행위를 서구권에서는 크리핑 업(cripping up)이라 이야기하며 꾸준히 비판되고 있습니다.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던 과거의 관행과 유사하게, 당사자의 경험과 정체성을 배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장애를 잘 연기했기 때문에 극찬을 받은 크리핑 업의 사례는 국내에서도 크게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 장애를 비장애인들이 연기해야만 할까요? 처음부터 장애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할 수는 없었을까요?

 

사례

장애인 배우가 무대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코다(CODA)』에서 청각 장애인을 연기한 청각 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는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2019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클라호마!』에서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배우 알리 스트로커(Ali Stroker)가 토니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요.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객들이 들어오는 극장 입구는 장애인들도 접근 가능하도록 설계된 경우가 많지만, (배우들이 이용하는) 백스테이지는 그렇지 못합니다" — The New York Times, 2019.06.09

이는 무대나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입장과, 이를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접근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장애인은 문화의 소비자일 수는 있어도, 예술의 창작자나 수행자로서 무대에 설 수 있다고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결국, 장애인이 예술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장벽이 됩니다.

국내에서 역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다운증후군을 가진 정은혜 배우나, 동일하게 다운증후군을 가진 상태에서 『사랑해 말순씨』 로 데뷔하여 『달자의 봄』, 『안녕하세요, 하느님』 등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고 오랜 경력을 쌓은 강민휘 배우를 유명한 성공 사례로 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례일 뿐, 성공한 이들이 존재한다 해서 장애인 배우의 접근성이 현실적으로 좋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연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은 인구의 12.6%가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2019년 기준 미국 100대 영화에서 2.3%에만 장애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정은혜 배우처럼 드라마에서 장애인 배우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한 것이 오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장애인 배우는 장애를 가진 캐릭터만을 연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캐릭터는 반드시 장애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야만 미디어에 등장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배역의 선택 문제를 넘어서, 미디어 속 '장애의 재현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장애인 배우가 오직 장애 서사가 필요한 역할에만 캐스팅된다면, 이는 곧 그들의 연기 활동이 '장애'라는 요소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꼭 짚어야 할 문제 중 하나인데요. 장애인 배우가 장애와 무관한, 평범한 인물이나 다양한 감정선을 가진 인물을 연기할 수는 없는 걸까요?

장애는 캐릭터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연기의 전제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장애인 배우가 비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하거나, 장애 설정이 드러나지 않는 역할을 맡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배우가 되기까지

장애인 배우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기회가 아닌 접근입니다. 대본을 점자로 제공하거나 오디오 파일로 변환하는 것, 수어 통역사나 촉각 안내자의 배치,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리허설 공간 마련 등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이러한 접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연기의 출발선에조차 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예대·한예종 등 주요 예술대학에서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점자 수업자료나 음성강의 자료가 제공된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이는 입학 자체를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이후 학습 과정에서도 차별을 낳습니다.

미국 UCLA 연극과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 수업과 멘토링을 운영하며, 수어 연출을 기본 커리큘럼에 포함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국내는 여전히 이러한 교육적 접근조차 체계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지원과 구조는 단순히 배려로만 받아들여져서도 안 됩니다. 장애인 배우는 그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술의 폭을 넓히고 서사의 깊이를 함께 더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공평한 기회란 같은 출발선이 아닌, 모두가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는 장애인에게 적합한 설계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설계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파라스타"는 운동선수, 배우, 뮤지션 등 장애가 있는 아티스트들이 소속된 국내 1호 장애 아티스트 소속사인데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청각장애 아이돌을 키우고 있다’고 설명해도 ‘가수인데 청각장애가 있어?’ 인거죠. 청각장애인인데 가수를 하는게 아니라, 가수인데 청각장애가 있는거예요.”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인터뷰, 경향신문, 2024.01.01

 

바뀌어야 할 것들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배우다움'의 기준입니다. 자유로운 이동, 명료한 발성, 표정의 다양성 등이 배우의 절대 조건처럼 여겨지는 현재의 기준은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표현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며, 연기도 그만큼 다양한 몸과 언어, 감각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제작 환경 역시 달라져야 합니다. 점자 대본, 수어 통역, 장애 이해 교육은 특별한 조치가 아니라 모든 현장의 기본값이 되어야 합니다. 장애인을 단지 감동적인 캐릭터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배우'로 인식하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마치며

좋은 연기란 결국, 같은 인간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부터가 단일하지 않고 다양한 신체 조건과 감각, 말투, 리듬, 각자의 삶의 방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연기만큼 이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또 있을까요?

장애인 배우가 무대 위에 선다는 건 그 다양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모두가 들려주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묻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장애인인데, 배우예요?”가 아니라, “배우예요. 그리고 장애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점을 모두가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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