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오프라인 접근성 이야기 - '널리'의 하루 1편

2015-05-06 14:25:16

안녕하세요. N-Visions입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널리에 게시한 글은 웹이나 모바일과 같은 온라인 접근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오프라인에서, 실생활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접근성 요소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공유하고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정안인과 대화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널리’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한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따라가 보면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 살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현재 우리나라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접근성 요소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실생활 속에서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의

이 시리즈는 스토리 형태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재미를 위하여 과장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널리’ 씨를 소개해드릴게요. ‘널리’ 씨는 30대의, 아주 체구가 큰 아저씨입니다. 전맹(빛조차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고요. 접근성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는 엄청난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활발한 성격이긴 하지만 말투는 아주 수줍죠. ‘널리’ 씨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네요.

 

“안녕하세요, 널리입니다. 음, 뭔가 좀 쑥스럽긴 하지만 저의 생활에 대해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널리씨의 인사, 목소리로 들어보실래요?




‘널리’의 하루 1편 - 출근길

널리 씨가 출근하기 위해 졸린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섭니다. 지하철역까지 가려면 약 15분 정도를 걸어야 하는데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한 정거장밖에 안 되는 거리라도 버스로 이동합니다. 지팡이를 이용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갑니다.

널리 씨는 흰 지팡이를 이용하고 있는데, 이 흰 지팡이는 법적으로 시각장애인에게만 허용된 것입니다. 시각적으로도 다른 색보다 잘 보이고, 일반적인 지팡이와 구별되어 지팡이 사용자가 시각장애인임을 알 수 있게 해주죠. 널리 씨의 것은 바닥에 빨간색 띠가 야광으로 되어있어서 밤에 더 잘 보일 수 있게 해준답니다. 지팡이의 사용이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보행 훈련이 필요합니다.

분리되어 있는 흰 지팡이
사진 출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홈페이지

버스 정류장이 중앙 차로에 있어서 건널목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요. 지팡이를 이용해 길을 걸어가며 열쇠고리 모양으로 만들어진 리모컨을 꺼내어 유도 버튼을 누릅니다.

열쇠 고리 모양 리모컨
사진 출처: 중앙보조기구센터 홈페이지

앗,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군요. 이 위치가 아닌가 보다 싶어 조금 더 걸으면서 한 번씩 리모컨의 유도 버튼을 눌러봅니다. 그랬더니 저 멀리 음성신호기에서 멜로디가 나오네요. 음성신호기 덕분에 길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음성신호기는 일반 신호등에 음성 기능을 부착하여 신호가 바뀌었음을 시각장애인들에게 알려주는 장치입니다. 예전에는 신호가 바뀔 때마다 음성 신호기에서 소리가 나는 방식이었으나 소음 문제가 제기되어 버튼을 누를 때만 소리가 나도록 변경했습니다. 이에 따라 리모컨을 보급하여 시각장애인 스스로 버튼을 찾기 어려운 문제를 보완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에 있을 때 리모컨을 누르면 음성 신호기의 버튼을 찾아 누르지 않아도 알림 음성이 나오게 됩니다.

음성 신호기는 신호를 알리는 기능뿐만 아니라 위치 유도 기능도 하는데, 시각장애인이 신호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을 때 소리를 내어줌으로써 건널목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널리 씨네 집 창문을 열고 유도 버튼을 누르면 근처 신호등에서 소리가 나곤 하는데 가끔 심심하면 눌러보기도 한다고 하네요.

 

건널목 신호등에 연결된 음성 신호기
사진 출처: 충청시티신문
 


길을 건너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신림역까지 가기 위하여 152번을 타야 했는데 잠시후 도착할 버스 정보를 음성으로 알려주고 있어서 152번이 곧 도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곧 도착할 버스 정보를 음성으로 알려주기는 하지만 여러 대의 버스가 같이 올 경우에는 안내 방송에서 나오는 순서와 버스가 도착하는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어서 도착하는 버스가 몇 번인지 100%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똑똑한 널리 씨는 본인이 타야 할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방송을 듣고 주위 사람에게 물어서 별 고생 없이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어떤 버스가 언제 온다는 것 자체를 전혀 알 수 없었으니 훨씬 좋아진 셈이죠.

 

버스 도착 안내 기기
사진 출처: 아름다운 그대에게 블로그

버스에서 내린 널리 씨는 지갑을 확인해 보고 오늘 회식 때 쓸 비상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고, 이런. 돈을 좀 찾아야겠군.’

널리 씨가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은행에 들어갑니다. 현금 인출기 중 시각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는 인출기가 요즘 많이 보급되어 있습니다. 저시력자를 위한 화면 확대 모드도 있고, 이어폰을 꽂아서 음성 안내에 따라 키패드로 ARS를 이용하듯 은행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저시력자를 위한 메뉴 확대 기능을 제공하는 ATM 화면
사진 출처: 기업은행 블로그

이어폰 꽂는 부분이 있는 ATM기
사진 출처: 중부일보

그런데 이런. 이어폰을 깜박하고 집에 놓고 왔네요. 당황해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낯선 분이 말을 걸어주십니다.

“저, 혹시 뭐 도와드릴까요?”
“아, 혹시 이어폰 가지고 계시면 한 5분만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빨리 가 봐야 하지만… 네, 뭐 잠깐이라면 빌려드릴게요.”

참, 용기도 좋네요. 아무튼, 이어폰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이어폰 꽂는 곳을 찾느라 시간을 좀 허비하긴 했지만 결국 이어폰을 현금 인출기에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어폰 빌려준 분이 옆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음이 급해졌나 봅니다. 서두르다 음성 안내를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무엇을 눌러야 할지 몰라 옆에 분께 여쭤봅니다.

“저기 죄송한데… 현재 화면에 뭐라고 나와 있나요?”
“음… 화면은 꺼져 있는데요.”

이어폰을 꽂아 시각장애인 모드로 인출기를 사용하면 프라이버시를 위하여 모니터가 완전히 꺼진다는 것을 널리 씨는 몰랐던 거죠. 어찌어찌 돈을 찾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잠깐,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던 널리 씨가 머뭇머뭇합니다.

‘오늘 내가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평소답지 않은 것이 ….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오늘 아침을 못 먹었잖아.’

널리 씨는 평생 아침을 걸러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그렇지, 그냥 출근할 리가 없습니다. 다시 버스 정류장 쪽으로 돌아가 정류장 바로 옆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잡아당겨도 문이 열리질 않네요. 본인이 원하는 것을 못 먹으면 온종일 우울해져 버리는 널리 씨는 그만 울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한쪽은 고정문이고 한쪽은 밀어야 열리는 문인데 문에 점자로 쓰여있지 않아 몰랐던 거죠.

왼쪽은 고정문, 오른쪽은 미세요라고 글씨로만 써있는 문
사진 출처: 재재유니님 블로그

널리 씨와 계속 동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오프라인 접근성 관련 항목과 마주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음 아티클도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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